로자 룩셈부르크(1871~1919)의 기일을 맞아

글: 고 정 희

붉은 꽃으로 남은 로자 룩셈부르크. 그녀는 누구였나? 겨울의 차가운 베를린 운하, 그곳에 버려진 한 여인의 몸. 자유로운 영혼도 함께 버려졌을까? 1919년 1월 15일, 로자 룩셈부르크의 생명이 꺾였을 때, 독일 혁명의 불꽃도 함께 사그라들었다. 그녀의 죽음은 단순한 정치적 암살이 아니라, 20세기 유럽이 겪게 될 폭력과 혼돈의 서막이었다. 나는 종종 베를린의 프리드리히스 펠데 묘지에 있는 그녀의 무덤을 찾는다. 무덤 위에는 언제나 신선한 꽃이 놓여있다. 붉은 카네이션, 그것은 그녀의 별명이자 그녀가 남긴 유산의 상징이다.

“자유는 언제나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자유여야 해”라고 외쳤던 그녀는, 역설적이게도 자유를 위한 투쟁 속에서 자신의 자유를 영원히 잃었다.

1898년, 젊은 로자는 꿈에 부풀어 베를린에 도착했다. 27세의 그녀는 이미 취리히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뛰어난 지성이었지만, 그녀의 깊은 눈은 학문적 성취보다 더 큰 무언가를 갈망했다. 당시 베를린은 유럽 사회주의 운동의 중심지였고, 독일 사회민주당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좌파 정당이었다. 폴란드 출신의 유대인 여성으로서, 그녀는 이중, 삼중의 차별에 맞서야 했지만, 그녀의 지적 예리함과 열정은 곧 베를린의 정치 무대에서 빛을 발했다.

베를린의 노동자 지구 노이쾰른과 베딩에서, 그녀는 공장 노동자들과 함께 호흡했다. 그들의 고된 일상, 그들의 분노와 희망이 그녀의 이론적 사고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학문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서재에서 책을 뒤적일 때, 로자는 거리에서 혁명을 노래했다. 베를린 노동자대학에서 그녀의 강의 시간에에는 항상 청중으로 넘쳐났다. 그녀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그 안에 담긴 확신은 강철보다 단단했다.

이 시기에 그녀는 칼 리브크네히트와 깊은 정치적 동지애를 형성했다. 법률가이자 국회의원이었던 리브크네히트는 그녀와 마찬가지로 전쟁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던 몇 안 되는 정치인 중 하나였다. 두 사람은 성격과 배경이 달랐다. 로자가 이론적 깊이와 분석적 예리함을 갖추었다면, 칼은 대중 연설과 직접 행동에 뛰어났다. 그들은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완벽한 정치적 파트너였다. 개인적으로도 깊은 우정을 나누었지만, 그들의 관계는 무엇보다 혁명적 이상에 대한 공통된 헌신에 기초했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독일 사회민주당이 전쟁 지원을 결정하자 그녀는 깊은 배신감을 느꼈다. 베를린의 거리에서 그녀와 리비크네히트는 용감하게 반전 시위를 이끌었고, 그 결과 여러 차례 투옥되었다. 베를린 감옥의 차가운 벽 사이에서도 그녀의 펜은 멈추지 않았다. 감옥에서 그녀가 쓴 편지들은 개인적 고통과 정치적 열망이 얽힌 문학적 걸작이다.

자유로운 영혼

한나 아렌트는 후에 이렇게 썼다: “그녀는 자신의 시대에 가장 자유로운 영혼 중 하나였다.” 아렌트는 룩셈부르크의 독창적 사고와 도그마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정신을 높이 평가했다. 그리고 그녀의 죽음이 독일 민주주의의 취약성을 드러내는 암울한 전조였음을 예리하게 지적했다.

1918년 11월, 독일 제국이 무너지고 혁명의 바람이 베를린을 휩쓸 때, 석방된 로자는 다시 베를린의 거리로 돌아왔다. 도시는 혼돈과 기대로 들끓었다. 석방 직후, 그녀와 리비크네히트는 ‘붉은 깃발(Die Rote Fahne)’이라는 신문을 공동 창간했다. 이 신문은 독일 혁명의 목소리가 되었다. 로자는 마지막 순간까지 이 신문에 글을 썼으며, 그녀의 날카로운 정치 분석과 열정적인 선동문은 베를린 노동자들 사이에서 열렬히 읽혔다. “자유는 언제나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자유”라는 그녀의 유명한 문구도 이 신문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그녀와 리브크네히트는 스파르타쿠스단(Spartakusbund)을 이끌며 독일의 진정한 사회주의 혁명을 꿈꾸었다. 1918년 12월 29일, 그들은 독일 사회민주당과 완전히 결별하고 독일 공산당(KPD)을 창당했다. ‘붉은 깃발’은 새로운 공산당의 공식 기관지가 되었고, 로자의 글은 이 급진적 좌파 운동의 이론적 나침반 역할을 했다.

베를린의 겨울은 혹독했고, 정치적 상황은 더욱 긴박해졌다. 1919년 1월 초, 에버트 정부가 베를린 경찰청장 에밀 아이히호른을 해임하자, 이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이 시위는 점차 무장 봉기의 성격을 띠기 시작했다. 스파르타쿠스단의 많은 구성원들이 이 봉기에 참여했지만, 역설적이게도 로자 자신은 이 시점에서의 무장 투쟁에 회의적이었다. 그녀는 독일 노동자 계급이 아직 충분히 준비되지 않았다고 판단했고, 시기상조인 봉기가 실패할 경우 혁명 운동 전체에 치명적인 타격을 줄 것을 우려했다.

그러나 혁명의 흐름은 이미 거스를 수 없었다. 1월 5일, 베를린 시내 곳곳에서 무장한 노동자들이 주요 건물과 신문사를 점거했다. 로자는 동지들과의 연대를 위해 이 봉기를 지지했지만, 내심 그 결과를 두려워했다. 그녀의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에버트 정부는 프라이코르(Freikorps)라는 준군사 조직과 제국군 잔존 병력을 동원해 무자비한 진압에 나섰다. 1월 12일까지 봉기는 완전히 진압되었고, 100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목숨을 잃었다.

스파르타쿠스 봉기의 실패는 독일 혁명의 비극적 전환점이었다. 에버트 정부는 이제 ‘볼셰비즘의 위협’으로부터 독일을 지켰다는 명분을 얻었고, 혁명가들에 대한 본격적인 탄압에 나섰다. 로자와 칼은 베를린에서 가장 격하게 수배된 인물이 되었다.

1919년 1월, 스파르타쿠스 봉기가 실패로 끝난 후, 그녀는 이미 죽음의 그림자가 자신을 따라다니고 있음을 알았을 것이다. 친구들이 도피를 권했지만, 그녀는 베를린에 남기로 했다. 마지막까지 그녀는 노동자 계급과 함께하고자 했다.

“사회주의냐 야만이냐”

당시 베를린은 정치적 격변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다. 1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황제국이 무너지고, 사회민주당의 프리드리히 에버트가 이끄는 임시정부가 들어섰다. 그러나 이 정부를 바라보는 시선은 두 갈래로 나뉘었다. 에버트와 그의 동료들은 점진적 개혁을 통한 의회 민주주의를 원했고, 룩셈부르크와 리비크네히트의 스파르타쿠스단은 노동자 계급 중심의 급진적 혁명을 원했다. 한때 같은 사회주의 운동의 동지였던 그들은 이제 베를린의 거리에서 서로를 향해 총을 겨누는 상황이 되었다.

에버트 정부는 신생 바이마르 공화국의 안정을 위협하는 세력으로 스파르타쿠스단을 간주했다. 더구나 구 제국군 수뇌부와 맺은 ‘그로너-에버트 협약’은 급진 좌파 세력 억제를 약속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의 공포가 독일 중산층과 보수층을 사로잡은 상황에서, 에버트는 ‘질서 회복’이라는 명분으로 강경 진압을 선택했다.

1월 15일 저녁, 베를린 빌머스도르프의 한 아파트에서 그녀와 칼 리비크네히트는 결국 체포되었다. 프리데리히 에버트 정부와 그의 사회민주당 동료들이 내린 명령에 따라, 자위대의 대위와 그의 부하들이 이 체포를 담당했다. 그들은 한때 같은 좌파 진영이었던 지도자들을 제거하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그날 밤 호텔 에덴으로 끌려간 로자는 개머리판으로 두 차례 가혹한 구타를 당했다. 그녀의 작은 몸은 피로 얼룩졌다. 자위대원들의 조롱과 모욕 속에서도 그녀는 침묵을 지켰다고 한다. 마침내 오토 룬게 중위가 총으로 그녀의 머리를 쏘았고, 그녀의 시신은 란트베어 운하에 던져졌다. “쓰레기는 쓰레기통에”라는 말과 함께.

차가운 죽음 

그녀의 시신은 몇 달 후인 5월 31일에야 운하에서 발견되었으며, 심하게 부패되어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상태였다. 오직 옷과 개인 소지품으로만 그녀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녀의 마지막 글은 예언적이었다: “나는 있었고, 나는 있으며, 나는 있을 것이다!”

오늘날 베를린은 그녀의 흔적으로 가득하다. 프리드리히스펠데의 무덤, 크로이츠베르크의 로자-룩셈부르크-플라츠, 그리고 매년 1월 그녀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수천 명이 모이는 추모 행진까지. 베를린과 로자는 하나가 되었다. 붉은 꽃으로 남은 로자 룩셈부르크는 단순한 역사적 인물이 아니다. 그녀는 베를린의 영혼 속에 살아 숨 쉬는 현재적 존재다. 자본주의의 모순, 민주주의의 취약성, 그리고 진정한 자유를 향한 끝없는 투쟁에 관한 그녀의 통찰은 오늘의 베를린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1919년 1월의 그 차가운 밤, 베를린 운하에 버려진 그녀의 몸은 사라졌지만, 그녀의 사상과 열정, 특히 자유로운 영혼은 새로운 세대의 투사들에게 영감을 준다. 매년 1월, 베를린의 거리를 가득 메우는 붉은 장미의 행렬은 그 증거다. 로자 룩셈부르크, 그녀는 있었고, 그녀는 있으며, 그녀는 있을 것이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주요 저서:

  1.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Sozialreform oder Revolution?, 1899) –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입장을 옹호한 초기 저작.
  2. 『자본축적론』(Die Akkumulation des Kapitals, 1913) – 그녀의 가장 중요한 경제학적 저작으로,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확장하여 제국주의와 식민지 팽창을 자본주의의 필연적 결과로 분석..
  3. 『러시아 혁명론』(Zur Russischen Revolution, 1918) –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을 지지하면서도 레닌의 권위주의적 경향을 비판한 글로,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관계에 대한 그녀의 비전이 담겨 있다.
  4. 『민족문제와 자치』(Kwestia narodowościowa i autonomia, 1908-1909) – 민족주의와 민족자결권에 관한 그녀의 견해를 담은 저작으로, 국제주의적 관점을 강조했다.
  5. 『정치경제학 입문』(Einführung in die Nationalökonomie) – 사후 1925년에 출판된 저작으로, 베를린 노동자학교에서의 강의를 바탕으로 작성한 경제학 교재.
  6. 『쥬니우스 팸플릿』(Die Krise der Sozialdemokratie, 1916) – 1차 세계대전 중 감옥에서 작성한 반전 선언문으로, “사회주의냐 야만이냐”라는 유명한 구절 등장.

참고 자료:

  1. P. Nettl의 ‘Rosa Luxemburg’, Hannah Arendt의 ‘Men in Dark Times’, Elzbieta Ettinger의 ‘Rosa Luxemburg: A Life’, 그리고 Klaus Gietinger의 ‘The Murder of Rosa Luxemburg’ 

로자 룩셈부르크 묘지 위치:

로자 룩셈부르크의 묘지는 베를린에 있는 프리드리히스펠데 중앙 묘지(Zentralfriedhof Friedrichsfelde)에 있다. 이곳은 독일 사회주의, 공산주의 지도자들의 묘지이며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가 나란히 묻혀 있다. 베를린 리히텐베르크 구역에 위치.

주소: Gudrunstraße 20, 10365 Berlin

U- & S-Bahn Lichtenberg. 도보로 약 10~15분, 또는 트램 M18, M21 Guntherstrasse 하차.

© 고정희의 오마이 베를린 /로자룩셈부르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