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벌써 35년이 되었다. 1989년 11월 9일 그날, 장벽이 무너진 세계사적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11월 7일부터 행사가 시작되었다. 그와 더불어 데모의 강도도 높아졌는데 그날 나는 그 사실을 잊은 채 길을 나섰다가 낭패를 보았다. 타고 가던 버스가 중간에 서더니 모두 내리라고 한다. 여기서부터 도로가 폐쇄되었으니, 지하철로 갈아타고 가란다. 가던 길을 따라 조금만 더 가면 목적지인데 그 목적지가 하필 데모가 빈번한 브란덴부르크 문 근처에 있는 까닭에 막아 버린 것이다. 무엇 때문에 데모하는지 이젠 물어보지도 않는다. 짐작 가는 바는 있었다. 문화 예산 삭감에 예술가 집단이 크게 동요하여 거의 매일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서 성토대회를 한다. 그들의 뜻에 동조하는 입장이므로 같이 데모는 못해도 불평은 할 수 없기에 마음을 비웠다. 마음은 비웠지만 내가 들고 가던 보따리는 비울 수 없었다. 보따리 안에는 겨울 국화가 심긴 포트 20개가 들어 있었다. 비운 마음에 낭패스러움이 스며들었다. 짐이 없다면 걸어가도 족한 거리였지만 보따리가 무거워 택시를 잡아보려는데 절대로 잡히지 않는다. 약속 시간은 가까워오고. 우선 전화로 늦는다고 얘기하고 지하철로 향했다. 엎디면 코닿는 거리를 지하철을 두 번 바꿔타고 빙빙 돌아 45분 늦게 도착했다.
내가 이렇게 헤매는 동안 대통령 관저 벨뷰 궁에서 사건이 터졌다. 물론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다. 대통령이 저격당했다거나 하는 큰 사건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떤 의미로 보면 저격당했다고도 볼 수 있다. 총알이 아닌 언어의 화살이 그의 가슴에 날아와 박혔다. 저격수는 마르코 마틴Marco Martin이라는 저명한 저술가였다. 장벽이 무너진 날을 축하하기 위해 대통령이 국내 귀빈들을 초대하여 연회를 겸한 행사를 열고 마르코 마틴을 연사로 초청했다. 텔레비전 토크쇼에도 늘 청바지에 셔츠차림인 그가 노란 셔츠에 파란 재킷으로 의관을 정제한 것이 불편했는지 아니면 곧 시작될 자신의 공격이 부담스러웠는지 다소 구부정한 자세로 마이크 앞에 섰다. 그의 연설이 끝나자 사람 좋다고 알려진 대통령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고 박수도 안 쳤다고 한다. 이어 연회가 시작되자 대통령은 마르코 마틴에게 다가가 노엽게 항의했고 “자네는 외교 정책이 어떤 건지 이해하지 못하네.”라 일갈했다고 그때 주변에 서 있던 인물들이 전했다.

대체 뭐라고 했기에.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노벨상 수상 소식 외에 글쟁이가 이렇게 언론을 들끓게 하는 것은 거의 없는 일이다. 한국의 한강 작가 노벨상 수상 소식에 독일 문학계가 크게 술렁였다가 조금 잠잠해진 찰나에 이 사건이 터진 것이다. 그런데 더 흥미로운 사실은 전국의 언론이 마르코 마틴에게 갈채를 보냈다는 사실이다. 잘했다. 시원하다. 정곡을 찔렀다. 누군가는 진실을 얘기해야 하는데 그가 총대를 잡은 것이다. 등등. 댓글도 마찬가지였다. 많은 사람이 요즘 세상 돌아가는 모습에 걱정과 우려와 분노를 품고 있음을 말해 준다.
며칠 뒤, 연설의 전문이 발표되었는데 연설문이지만 꼼꼼하게 정독해야 할 정도로 난해했다. 지난 35년 역사와 정치에 대한 비판을 5분짜리 연설에 정교하게 압축하려니 당연한 일이다. 제목이 벌써 경종을 울린다. “동서에서 아직도 지속되고 있는 독일의 거짓과 눈가림” 그의 말은 명료했고 가차 없었다. 러시아 정책의 실패가 핵심 주제였는데, 그는 이렇게 말 문을 열었다.
“존경하는 대통령님, 신사 숙녀 여러분. 누구보다도 여기 오늘 초대받지 못한 폴란드 솔리다르노시치 혁명과 그단스크 조선소 스트라이크의 영웅들. 그대들이 없었다면 1989년 장벽의 붕괴도 없었을 겁니다. 오늘 독일 내부 인사들만 초대된 이 자리에 부재한 그대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감사드립니다는 폴란드 말로 했다. 활시위가 당겨진 것이다.
“지금 4년째 접어드는 우크라이나 전쟁은 모두 푸틴의 책임이라며 말끝마다 푸틴, 푸틴하는데 우리는 뭐 하였습니까?” 사실, 오래전부터 푸틴이 제국주의적 야망을 키운다는 징조는 많았다. 여러 전문가가 푸틴을 조심해야 한다고 경고했지만, 정치가와 산업계에서는 듣지 않았다. 푸틴과 호형호제하며 값싼 천연가스의 파이프라인을 확보하기에 급급했다. 전쟁자금을 퍼다 준 셈이다. 그와 더불어 다시 커지고 있는 반 유대 감정, 구동독 지역에서의 극우파의 득세, 이런 모든 것에 관해 대통령에게 정면으로 책임을 물었다. 현 독일 연방의 대통령 슈타인마이어는 사회민주당 소속으로 외무부 장관, 총리실장에 이어 총리 선거에 출마했다가 실패하고 7년 전 국민대표회의에서 대통령으로 추대되었다. 독일 연방에서는 총리가 행정부 수반으로 실권을 가지고 대통령은 국가의 원수, 나라의 꽃으로 독일을 대표하는 역할을 한다. 그가 외무부 장관을 지내던 시절에 푸틴에 대한 경고를 무시했음은 사실이다.
물론 대통령 혼자 모든 것에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국가의 원수로서 권위만 누릴 것이 아니라 대표로 화살도 맞아야 한다는 것이 마르코 마틴의 의도였을 것이다. 국민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도 대통령의 역할이다. 이는 시대를 읽고 이를 요약하는 고무적인 발언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리하여 역대 대통령 어록에 명문을 한 구절씩은 남겨야 한다. 가장 유명한 것이 누구에게나 존경받던 바이츠제커 대통령이 남긴 단 한 문장이다. 1945년 5월 8일, 독일의 무조건 항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사실상 종전되었다. 패전국 독일은 오랫동안 그날을 기념하지 못하고 부끄러워했다. 1970년대 빌리 브란트 총리 대에 비로소 기념일이 되었다. 그러나 그날을 어찌 불러야 할지 몰랐다. “패전의 날”, “군사적 붕괴의 날”, “국치의 날” 등 여러 이름이 이어졌다. 1985년 당시 대통령이었던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가 기념식 연설을 통해 “5월 8일은 해방의 날입니다.”라고 말끔하게 정리해 주었다. 외세에서 해방되어야만 해방이 아니다. 나치 독재와 전쟁이라는 비인도적 행위로부터 ‘해방’된 날이라는 뜻이었다. 그로부터 5월 8일은 공식적으로 해방의 날이 되었다.
하다못해 청탁 사건으로 불명예 퇴임한 대통령 크리스티안 불프도 “이슬람은 독일에 속한다.”는 말을 어록에 남겼다. 그런데 현 대통령 슈타인마이어는 벌써 7년째인데 아직 명언을 한 구절도 남기지 못했다. 찬란한 언어를 매일매일 쏟아내는 마르코 마틴에게 날로 펑퍼짐해지는 대통령이 무책임하게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마르코 마틴에게는 “어떤 이념에도 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지식인의 뛰어난 표상”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다닌다. 나중에 물의를 일으켜 송구하다고 소감을 밝히면서도 용감했다는 평에는 부끄러울 따름이라고 대답했다. 그는 동독 출신이다. 1970년 생으로 지금 50대 중반이다. 19세에 참전 거부로 대학 입학 자격을 뻬앗기고 수감되어 혹독하게 취조당한 뒤 풀려나 서베를린으로 도망했다. 서베를린 자유대학에서 독문학, 정치학과 사학을 공부하고 현재 베를린에서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그때 참전전면거부 의사를 철회하라고 압박을 당할 때 좀 더 용기를 보이지 못한 것이 지금도 부끄럽다고 한다. 철회하고 풀려난 그때의 일을 참회하듯 그는 정세가 어려운 지역만 돌아다니며 취재하고 많은 책을 썼다. 팬클럽 ‘수감중인 작가Writers-in-Prison’ 분과의 위원이기도 하다. 여러 해 동안 전 세계의 반체제 성향의 작가와 지식인을 만나 인터뷰하고 2019년에 “반체제적 사고. 시대의 증인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라는 책을 냈는데 명저로 꼽힌다. “산살바도르의 밤”, “홍콩의 마지막 날들” 등의 에세이집도 발표하는 족족 까다로운 평론가들의 호평이 이어지는 문장가이다.

독일의 역사 때문에 이스라엘에 우호적이어서 자주 이스라엘을 방문하고 베를린에 사는 유대인들과 교류한다. 2023년 10월 7일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이 있었던 뒤, “10월 7일 이후의 유대인의 삶”이라는 에세이적 리포트를 써서 2024년에 발표했다. 그러나 양방의 공격이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으로 치달으며 이스라엘이 희생자에서 가해자로 변질되어 가고 국제형사재판소에서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 체포 명령을 내리는 등, 뜻하지 않은 국면으로 번지는 지금 마르코 마틴은 어떤 생각을 할까. 그의 다음 책이 기다려지는데 그는 정치 칼럼니스트로 정세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결정으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에 관해 이야기하는 사람 칼럼니스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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