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고정희
친하게 지내는 독일인 선배가 있는데 내년이면 85세가 된다. 꼽아보니 나치 시대에 태어나 히틀러의 영향권 속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대화를 나누다가 이야기가 나치 시대로 흘러가면 선배의 몸이 굳어지면서 심리적 방어 태세로 순간 돌입하는 것이 느껴지곤 했다. 대체 무엇을 방어하려는 것일까. 본인도 그것을 의식했는지 어느 날 힘든 고백을 했다. 히틀러 이름을 들으면 지금도 반사적으로 생크림을 얹은 딸기 후식이 떠오른다고 했다. 충격적 고백이었다. 지우고 싶어도 지워지지 않아 힘들다고 했다. 생크림 얹은 딸기 영상을 머리에서 지우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지워야 한다는 강박과 지우고 싶지 않다는 본능이 싸우고 있을까? 어린이집에서 달콤한 후식을 나눠주며 이건 히틀러 총리가 너희들을 사랑해서 주는 거라고 했을까? 선배는 그 쓰고 달콤한 기억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 온몸의 근육을 긴장시켰던 걸까?
히틀러는 영상의 힘이 얼마나 무서운지 누구보다 잘 이해했고 그것을 철저히 이용했었다. 선전과 선동을 담당했던 괴벨스 장관이 있었으나 다큐 영화 제작은 히틀러가 평소 높이 평가했던 감독에게 직접 의뢰했다고 한다. 그 감독이 레니 리펜슈탈Leni Riefenstahl(1902~2003)이라는 여성이었다. 후일 히틀러의 영화감독으로 불리게 된다.
1933년부터 3년에 걸쳐 뉘른베르크에서 대대적으로 거행했던 나치 전당대회를 영화로 기록해 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각각 “믿음의 승리’, “의지의 승리”, “해방의 날’이라는 제목으로 다큐 삼부작을 만들어 모두 베를린 ufa 영화관에서 상영했으며 리펜슈탈은 이 영화로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는 등 명성을 얻었다. 실은 영화를 만들기 위해 뉘른베르크에 웅장한 전당대회장을 새로 짓고 수만 명이 사열하는 장면들을 연출했다고 한다. 전당대회라기보다 오히려 군대 사열식에 가까웠다.
이어 1936년에는 리펜슈탈이 카메라맨 30명을 총지휘하며 만든 베를린 올림픽 다큐 영화가 또다시 큰 성공을 거뒀다. 대한제국의 손기정 선수가 마라톤에서 우승한 바로 그 올림픽 경기였다. 등번호 382를 달고 제일 앞서 결승 지점을 향해 달리는 손기정 선수의 마지막 질주 장면을 생생하고 감동적으로 그려낸 바로 그 감독이었다. 모두 세 시간이 넘는 분량인데 1, 2부로 나눴으며 1부는 “민족의 향연”, 2부는 “미의 향연”이라 하였다. 선수들의 완벽하게 다듬어진 아름다운 신체와 동작의 향연이라 해도 좋겠다. 1부 도입부와 2부 결말이 명장면으로 영화사에 길이 남게 된다. 리펜슈탈은 이 영화로 베니스 영화제에 나가 무솔리니 컵을 위시하여 수많은 상을 받았다.

전당대회 기록 영화 역시 혁신적인 촬영기법과 뛰어난 영상 미학으로 지금까지도 선전 영화의 초고봉으로 인정받고 있는데 악을 선전한 영화의 미학이 이렇게 뛰어나도 되느냐는 것이 쟁점이 되고 있다. 예술과 선, 도덕이 공존하기는 어렵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라는 평론가들이 많다. 사회에서 오가는 논쟁과 무관하게 영화계에서는 리펜슈탈의 기법이나 장면을 수없이 모방하고 있다. 가장 큰 예가 스타워즈이며,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에서도 본을 받았고 심지어는 조지 부시, 트럼프 등 대통령들도 선거운동에서 리펜슈탈의 연출 기법을 본떴다.
리펜슈탈은 전후에 독일 뿐 아니라 미국, 프랑스, 영국, 스웨덴 등지에서 숱한 인터뷰 요청을 받았다. 거절도 아니하고 꼬박꼬박 참석하여 자기는 나치와 결탁한 적이 없다, 히틀러와 별로 잘 아는 사이가 아니었다, 유대인 학살 등 그때 일어났던 참사에 관해 아는 바 없었다는 둥 일관되게 모든 것을 부인했다. 그리고 자신이 추구한 것은 오로지 예술이었다는 점을 잊지도 않고 되뇌었다.

1936년 베를린에서 개최된 올림픽 다큐영화를 촬영하는 장면. 리펜슈탈은 이 영화를 만들기 위해 제작사를 차렸다. 훗날 올림픽 위원회에서 제작 의뢰를 받았다고 극구 주장했지만 히틀러가 직접 의뢰했고 막대한 비용을 지불한 것이 증명되었다. 출처: Bundesarchiv

리펜슈탈이 1970년대에 발표한 사진집 “누바인 – 다른 별의 사람들” 타이틀. 이 사진집이 큰 성공을 거두어 리펜슈탈은 잠시 재기하는 듯 보였다.
1970년대에 들어와 앤디 워홀, 데이비드 보위, 믹 재거 등의 예술가들이 리펜슈탈 영화의 영상 미학을 발견하여 매료되어 있을 때, 미국의 문화평론가 수전 손택Susan Sontag(1933~2004)은 유일하게 냉철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계기가 된 것은 리펜슈탈이 근 30년의 침묵을 깨고, 누바인 – 다른 별의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내어놓은 사진집이었다. 수단의 누바 산맥에 사는 원주민들을 찍은 사진과 리펜슈탈의 에세이가 담긴 책이다. 이 사진집 역시 미학이 뛰어나 나오자마자 큰 화제가 되었고 미국판도 나왔다. 2차 대전 종료 후 리펜슈탈은 작품 생활을 하지 못했었다. 히틀러의 영화감독을 넘어 히틀러의 신부였다는 소문까지 돌았던 터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인터뷰에 응해 그 사실을 극구 부인하는 외에는 할 일이 없었다. 그러다가 사진집의 성공으로 재기하는 듯 보였다. 수전 손택은 파시즘의 유혹fascinating fascism이라는 제목으로 롱에세이를 발표하여 리펜슈탈의 작품세계를 심층분석하고 그에 내포된 위험천만한 파시즘의 이념을 벗겨냈다. 전후 재판에서 리펜슈탈은 나치에 동조하기는 했지만, 범죄에 가담한 사실은 입증되지 않아 풀려났다. 수전 손택은 당시 재판에서의 기소 명분이 적절치 않았음을 지적했다. 히틀러나 나치 수뇌들과 얼마나 친밀한 관계였는가에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고 리펜슈탈이 나치를 선전하고 미화하는 영화를 적극적이다 못해 열정적으로 만들었다는 사실 그 자체를 평가해야 한다고 일침을 가했다.
그러나 정작 수전 손택이 에세이를 통해 의도했던 것은 파시즘이 주는 유혹에 대한 경고였다. 리펜슈탈의 사진집은 누바인들의 우월한 기럭지와 단련된 신체의 아름다움을 묘사하는데 그치지 않고 건강한 신체의 찬양, 지식층에 대한 혐오, 원시성에 대한 낭만, 죽음을 불사한 싸움을 통해 선발된 우두머리에 대한 광적인 신앙과 컬트 등 나치의 사이비 종교적 속성을 누바 부족에게 이입시킨 것을 꼬집었다. 그리고 아직도 사람들에겐 그에 대한 동경이 남아 있음을 지적했다.
독일에서도 수많은 영화인과 언론인들이 비판적 시선을 가졌으나 리펜슈탈의 무시무시한 성격 때문에 입다무는 상황이었다. 인터뷰만은 돈벌이가 되었기에 – 근 천만 원 정도의 출연료를 요구했다 – 꼬박꼬박 응했었다. 한편 자신에게 붙어 다니는 꼬리표, 히틀러의 영화감독임을 부인하는 계기로 인터뷰를 역이용했던 것도 같다. 아니, 아니라고 주문처럼 되뇌어 마침내는 그것을 믿는 사람들까지도 생겨났다. 영화를 괴물처럼 만드는 천재인데, 정치에는 문외한이어서 히틀러에게 이용당했다는 신화가 점점 퍼져갔다. 진실은 그 반대였을 것이다.
2003년에 102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노터치’였다. 누군가 진실을 밝히려 하면 즉시 소송을 걸었기 때문이다. 진실이 들통날 것이 겁나서 눈을 부릅뜨고 그리 오래 버틴 걸까?
단 한 번 예외가 있었다. 리펜슈탈은 2차 대전 당시 강제수용소에 갇혔던 집시들을 선발하여 영화의 엑스트라로 쓴 적이 있었다. 나중에 이 집시들 대부분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해당했다. 어느 인터뷰에서 그 집시들의 운명에 대해 질문을 받자, 리펜슈탈은 “전쟁이 끝난 뒤에 그들과 몇 번 만났다.” 라고 새빨간 거짓을 말했다. 그 인터뷰를 보고 미심쩍어 조사에 착수한 여인이 있었는데 니나 글라디츠Nina Gladitz라는, 역시 다큐를 만드는 감독이었다. 오랜 준비 끝에 레포타주를 만들어 내보내며 “그 집시들은 수용소에서 살해당했다. 리펜슈탈은 그 집시들의 운명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다.” 라고 말했다가 바로 소송에 걸렸다. 오랜 법정 싸움 끝에 니나 글라디츠가 이겼는데 그건 빼도박도 못할 증거자료를 제출했기 때문이었다. 리펜슈탈이 2003년 마침내 세상을 떠나자, 봇물이 터진 듯 각종 매체에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다는 얘기로 부터, 영화감독으로서의 재능은 오히려 평범했으나 재능있는 인물을 귀신같이 알아 보고 그 재능을 자신의 것으로 빼앗는다는 천재적이었다는 설까지 다양했다. 그 예로 리펜슈탈과 함께 영화를 만들었던 빌리 칠케Willy Zielke가 거론되었다. 빌리 칠케야 말로 천재였는데 그걸 알아본 리펜슈탈이 칠케의 영화가 상영되는 것을 저지하고 자기 팀으로 불렀다는 것이다. 올림픽 영화의 도입부를 맡기고 거의 죽을 만큼 혹사하다가 정신병원에 집어넣고 강제 불임수술을 받게 했다는 이야기다. 정신병자들을 강제로 불임시켰던 나치들의 비인도적 행위를 이용한 것이다. 드라마에 나오는 최종보스 이야기 같다.
진실은 어디에 있을까?
지난 10월에 개봉한 다큐 영화 “리펜슈탈”에서 많은 것이 분명해졌다. 이 역시 영상의 힘이었다. 누가 각본을 쓴 것이 아니라 리펜슈탈로 하여금 스스로 놓은 거짓의 덫에 걸려들게 한 것이다. 아무 해설도 나레이션도 없다. 우선 리펜슈탈이 찍힌 사진이나 특정 장면이 보이고, 인터뷰에서 그 장면의 내용을 적극 부정하는 클립을 겹치는 방식을 썼다. 예를 들어 히틀러와 다정하게 대화하는 사진 여러 컷과 함께 히틀러에게 친필로 쓴 아부형의 긴 편지를 천천히 보여주었는데 관객들이 그 편지를 다 읽었을 즈음, “나는 히틀러를 잘 몰랐다. 그에게 영화 제작을 의뢰받은 것이 전부다.” 라고 말하는 리펜슈탈의 음성이 들려왔다. 가장 인상깊던 장면은 리펜슈탈이 신세를 망쳐놓았다는 빌리 칠케가 어느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아름다운 신체의 청년을 촬영하던 광기어린 모습이었다. 아도니스의 조각을 연상시키는 그 청년이 나체로 창던지기, 원반던지기 등을 하는 것으로 보아 올림픽 영화의 도입부를 찍는 것 같았다. 그때 탄생한 스틸컷이 리펜슈탈의 이름으로 여기저기 발표된 것이 오버랩되자 소름이 끼쳤다.
리펜슈탈은 자신의 유품과 유작을 700개의 큰 상자에 담아 보관하고 있었다. 사후 10여년이 지나서야 유족들이 그 상자를 국가, 즉 프로이센 문화유산 재단에 기증했다. 잔드라 마이쉬베르거라는 유명한 토크 마스터가 그 소식을 듣고 자신이 유품 정리를 맡고 비용도 대겠다고 자청했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마이쉬베르거는 똑소리가 나는 매우 총명한 여성으로 유능하면서 깊은 신뢰와 호감을 주는 방송인이다. 토크쇼 경력이 30년이 넘고 상도 많이 받았다. 리펜슈탈이 백세(!)되던 해에 그녀를 토크쇼에 초대하여 인터뷰했는데 그때의 경험이 너무 충격적이어서 좀 더 파고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 토크쇼는 독일과 프랑스 방송사에서 동시에 송출되었다. “사람들을 많이 만나 대화하다 보니 이젠 누가 거짓말을 하면 바로 촉이 온다. 그러나 리펜슈탈 같은 단단한 가면은 본 적이 없다. 그 긴 세월 하도 거짓을 말하다보니 스스로 그것을 진실로 믿고 있는 것 같았다.” 그날 리펜슈탈로부터 단 한마디의 진실도 얻어내지 못했고 오히려 자신이 그녀의 가면에 부딪혀 깨졌다고 말했다. 그리고 여태 만나서 대화한 인물 중 가장 불쾌한 사람이었다고 밝혔다.

리펜슈탈이 백세 되던 해에 Helmut Newton이 찍은 사진. 화장을 고치는 리펜슈탈의 뒤에는 젊은 시절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출처: The Helmut Newton Estate / Maconochie Photography /Orell Füssli Verlag
마이쉬베르거는 팀을 짜서 자료 정리를 시작했다. 자료의 분량으로 보아 영화를 만들기에 충분하다고 여겨 안드레스 파이엘이라는 영화감독을 초대했고 자신은 제작을 맡았다. 상자를 열어 본 뒤에 받은 느낌은 ‘내 죽은 뒤에 나는 이런 사람으로 보이고 싶다’라는 의도에 따라 자료를 분류해 둔 것 같다고 했다. 리펜슈탈은 이미 생전에 문제가 될 만한 영상자료와 사진 및 서류들을 모두 폐기했는데 촬영을 혼자서만 한 것도 아니고 워낙 유명 인사였으므로 다른 촬영기사들의 영상, 일반 기자들이 찍은 사진, 당시 언론에 실렸던 기사며 각종 기록들까지 모두 폐기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 사라진 장면들을 수년간에 걸쳐 찾아낸 뒤에 비로소 영화를 완성할 수 있었다고 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답답했다. 극장을 나와서 우선 심호흡부터 했다. 마이쉬베르거의 말처럼 정체가 불분명한 불쾌함이 가슴을 짓눌렀다. 그 불쾌감은 아마도 영혼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리펜슈탈의 얼굴에서 비롯된 것 같았다. 리펜슈탈은 발레리나로 시작해서 영화배우가 되어 알프스 등반 영화만 찍을 정도로 신체적으로 우월했다. 나치가 표방했던 독일 여인의 기준에 꼭 맞는 타입이어서 히틀러가 “가장 이상적인 독일 여인”이라 평했었다고 한다. 나치 시대의 이상적 독일인의 조건은 우월한 신체와 맹종의 정신, 두 가지뿐이었다. 영혼은 빈약할수록 바람직했다. 그래야만 악마를 환호하는 군중이 되어 히틀러가 명하는 대로 죽음을 향해 행진할 수 있을테니까. 그리고 유대인이나 집시들을 향해 발포할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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